18장. 응답이 이해를 연다.
믿음은 충분한 지식이나 납득할 만한 논증으로 시작되지 않는다.
본문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믿음에 대해 어떤 설명도 요청하지 않았다.
어린아이는 그저 품에 안겼고, 세리는 단 한마디 “불쌍히 여겨주십시오”라고 말했으며, 맹인은 예수라는 이름 하나로 외쳤다.
그들은 모두 이해한 뒤에 반응한 것이 아니었다.
반응해야 할 때에 반응했고, 그 응답 안에서 오히려 진리를 경험했다.
이해가 응답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응답이 이해를 열어가는 신앙을 보여준다.
예수께서 “말씀이 감추어졌다"라고 하신 것도, 하나님이 진리를 숨기셨다는 뜻이 아니다. 인간이, 스스로 말씀 앞에서 자신을 닫아버리는 경우를 지적한 말씀이다.
하지만 여기서 드는 의문이 있다.
이해하지 못한 채 반응하는 것은 맹신으로 흐를 위험이 되지 않는가?
성경은 맹신을 요구하지 않는다.
끊임없이 “묻고, 깊이 생각하고, 기억하라"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모든 것을 납득한 후에 움직이려는 태도는,
오히려 신앙의 문 앞에서 영원히 멈추는 이유가 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 점이 내게는 새롭게 다가왔다.
신앙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뜻한다.
모든 것을 다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신뢰할 만한 근거를 발견했을 때 시작하는 사랑처럼, 진리에 대한 응답도 그런 방식으로 시작된다.
예수께서는 이해가 닿지 않는 자리에서 내게 이렇게 물으시는 것 같다:
“지금까지 들은 것만으로도 나를 신뢰할 수는 없겠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지만, 지금 더 보류하는 것이 오히려 내게 더 이상 정직하지 않은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면, 응답할 순간이고, 그 믿음은 맹목이 아니라 관계에 대한 신뢰다.
“듣는 자에게 들리고, 두드리는 자에게 열릴 것이다.”
이 글의 확장: 칼럼 1화 [기적 1부]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빛
삶을 건 질문과 응답의 의지가 있는 사람에게
진리는 지식이 아니라 현실로 다가온다.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취었으므로
그들이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누가복음 18장 34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