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의 문맥

고센의 풍경. 창세기 46~47장 본문

묵상_에세이 [성경의 서사]/창세기

고센의 풍경. 창세기 46~47장

집사 K 2026. 5. 31. 00:40

야곱은 그간 속고 속이는 긴장 속에서 한시도 편히 쉬는 날 없이 치열하게 살아왔다. 가나안을 떠나 애굽이라는 거대하고 우상숭배로 가득한 세상으로 이주해야 할 때, 야곱에게는 언약을 벗어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이는 세상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약속을 더 중시했기에 생긴 거룩한 두려움으로 보인다. 하나님께서는 그 두려움의 중심을 지지하시며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개입하신다. 이 이주가 결국 언약을 성취하기 위한 과정임을 알리시며, "내가 너와 함께 내려가겠다"는 임마누엘의 선언으로 정당성을 부여하신다. 하나님은 앞서 요셉을 애굽에 보내셨고, 유다를 보내셨으며, 이제 야곱 곧 이스라엘 전체를 그곳으로 보내신다.

야곱의 인생은 흡사 검붉음 속에 튀는 황금빛의 비비드한 긴장의 연속이었다. 그것은 화려해 보이기도 하지만 쉼 없는 시간이었다. 이제 주권적인 보내심을 통해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고센 땅을 밟으며 비로소 숨을 깊게 내쉬는 파스텔톤의 이완을 경험한다. 그러나 야곱이 비록 접경지라 하더라도 애굽이라는 우상 문화 속에 들어가는 현실의 긴장은 여전히 남아있다. 하지만 요셉과 베냐민, 유다 모두 잃지 않았고 함께하며 무엇보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확신에, 마치 양처럼 온전히 의지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고센 바깥은 기근으로 모든 것을 잃는 격한 긴장 상태를 겪게 되지만, 고센 안은 상대적으로 평온함을 누린다. 이렇게 기록된 가문, 이스라엘 전체가 한 무리의 양과 같은 공동체로 새 삶을 시작한다.

고센 땅의 풍광은, 마치 풀과 햇살 사이로 조색된 양털의 색처럼, 밤새 팔에 핏줄이 설 만큼 언약과 씨름하며 놓지 못하고 있던 야곱의 인간적인 힘을 내려놓게 한다. 이제 그 햇빛 아래 자유롭게 다니는 양떼처럼 이미 공급된 풀밭과 햇살, 그리고 바람처럼 불어오는 성령과 목자이신 주만 의지하면 된다는 평안을 준다.

이삭이 나무를 짊어지고 오르던 모리아산의 메마른 바람이 있었다.
그 바람은 2천 년 후 예수께서 디베랴 강가에서 베드로를 위해 생선을 굽던 온기를 머금는다.
그 온기를 싣고 다시 시간을 거슬러 꿈꾸는 어린 요셉을 애굽으로 밀어주던 뜨거운 시로코의 열기는, 이제 고센 땅의 비옥한 토양의 흙내음을 일으키는 바람이 된다.
어디서 오는지 모르는 이 바람은 시공간을 나선으로 가로지르며 수천 년의 시간 동안 야곱의 곁에 있었다.

요셉의 목을 안고 "지금 죽어도 족하다"는 야곱의 고백은 이 순간을 위해 그간 살아있어서 다행이며 생생하게 살아있음을 느낀다는 의미의 표현일 것이다. 야곱은 강인했고 감정보다 이성적 판단을 앞세워 쉽게 울지 않던 사내였다. 그 터져 나오는 눈물은 수십 년간의 긴장 속에서 이완되며 밀려오는 서글픔과 안심이 섞여 흐른다. 내려놓음의 순간이다.

나일강 하류 삼각주의 정기적인 범람으로 토양이 매우 비옥한 고센 지역은 애굽과도 인접하였다. 애굽은 농경 중심 사회이면서 소나 양을 우상화하였기에, 그 우상을 잡는 목축을 불길하게 여겼다고 전해진다. 정치, 종교, 문화에 통달한 요셉은 이런 현실적 고충을 고려하여 가문을 위해 가장 좋은 방향으로 이주를 배려한 것이다.

이 모든 과정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주권적으로 작용하지만, 동시에 그 주권을 따르며 세상 속으로 보내어지는,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책임을 감당하는 인간이 존재한다. 인간의 죄를 직시하고, 서로의 잘못 안에서도 용서와 평안을 구하며, 눈앞의 구체적인 상황을 배려하는 가운데 하나님은 늘 동행하신다.

신앙은 하늘의 이상만을 따르는 것도 아니며, 땅 위에서 서로의 마음을 살피는 것이다. 포도나무가 가지치기나 곰팡이 등 쉽지 않은 과정을 거쳐 명품 와인으로 숙성되듯, 각자가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아 성숙하고, 연합을 알아가는 가운데 형통한 삶의 역사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고센의 평야에서 본다. 가지치기의 아픔을 견딘 포도나무 또한 이 비옥한 고센 땅 한켠에서 열매를 맺기 시작하는 것 같다.

물감 다섯 개로 고센 평야의 햇살의 온기를 그려본다. 위쪽부터 채운 피콕 블루의 하늘에, 퍼머넌트 화이트에 레몬 옐로우를 섞은 크림색의 햇살을 은은하게 입힌다. 그 크림색에 푸르시안 블루를 조금 섞어 부드러운 올리브 그린으로 아래의 완만한 목초지 언덕을 채우고, 그 물감이 마르면 위에 다시 햇살과 같은 크림색으로 양을 한 마리씩 네모진 마시멜로처럼 툭툭 찍어 그려본다. 카민 레드로 들꽃을 그려 넣어도 좋겠다.

최근 이런저런 긴장된 상황과 마음을 어렵게 하는 고민도 있었다.
그러나 모리아산의 이삭을 혼자 두지 않으신 하나님, 자신을 용서하기 힘들었을 베드로에게 생선을 구워주시던 예수님, 형들에게 버림받아 노예로 팔려가던 요셉을 최고급 향료와 함께 뜨겁게 밀어주던 성령의 바람이 서로 수천 년의 간극을 둔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빛, 온기로 다가온다.

세상을 살며 긴장과 이완의 조화는 중요하다.
긴장될 때는 숨을 길게 쉰다.
답답하면 바람을 맞으러 나간다.
바람이 어디서 불어왔을까 생각만으로,
요셉과 함께 한 몰약의 향기를 떠올리게 한다.
바람을 맞는 것만으로도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고백할 수 있고, 
그것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점이 내겐 큰 은혜가 된다.


아래는 색채와 쉼 모임에서 그린 고센의 풍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