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의 문맥
별의 언약: 별의 시차를 넘어온 실재. 창세기 15장 본문
아브람은 자식 없음을 한탄하며 현실 가능한 방편으로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삼으려 한다.
이에 하나님은 하늘의 별을 보여주시며 약속하신다.
별의 언약
눈에 보이는 이 상징은 빛이며 나아가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빛이다.
다 이해할 수 없으나 실로 거대하며, 인간의 시력으로는 겨우 분별될 정도의 점으로만 보이는 별.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존재. 분명히 존재하는 실재이면서 다른 시간의 존재. 이처럼 현실이면서 현실이 아닐지도 모르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본다. 그런 별을 두고 약속하신다.
단지 무수히 많은 자손에 대한 수적인 비유였다면 별이 아닌 바닥의 모래알이나 숲속의 나무도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별만의 의미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별만이 가진 특성은 룩백 타임, 이른바 별빛의 시차다. 더 구체적으로는 다른 시간축의 연결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별 이외에 다른 것에서 찾을 수 없는 설득력을 가진다.
과거에는 빛의 속도나 별의 거리 등을 예측할 수 없었기에 아마 별을 본다는 것을 같은 시간대의 경험으로 느꼈을 것이다. (이처럼 성경의 메시지가 한 번에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점진성을 가지는 것은 인간의 한계 때문이다.)
다시 이어가면, 하나님의 약속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이해되지 않는 다른 시간축에서 비롯된다. 그 의미를 포착하려면 우리가 머무는 시간 흐름에 대한 다른 관점이 필요하다. 아니, 우리의 시간에 하나님의 시간을 가두지 않는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겠다.
우주에서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빛의 속도가 절대적인 상수로 존재한다는 것을 떠올려보면, 빛으로 연결되는 질서라는 것이 여러 측면에서 수긍이 간다.
하나님은 별을 두고 약속하셨다.
인간이 보는 별은 이미 시작된 지 수천 광년이 지난 빛일 수 있다. 우리의 시야, 가시 범위는 얼마나 제한적인가. 인간의 뇌는 효율을 추구하는 특성상 비어 있는 틈을 견디지 못해 무언가를 채우고 그것을 실재로 속여 안심한다. 가시광선 밖의 '마젠타'를 실재하는 색처럼 여기는 것처럼 말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이해하려면, 그 섭리가 이해하기 어렵다는 점과 그럼에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을 동시에 의식해야 한다.
별이란 얼마나 오묘한가.
현실에 존재하는 가장 초현실적인 풍경은 밤하늘 별들의 군집이다. 그러나 별빛은 현실에서 목격된다. 그것이 2,000년 전의 일이라 해도 그 빛은 지금 우리 눈에 닿는다. 믿음은 그 빛이 얼마나 오래전에 시작된 약속이든 지금 우리에게 도달한 실재임을 믿는 것이다.
오히려 물리적으로는 믿을 만한 여지가 많다. 인류의 예술도 약속된 체계 속에서 빛과 소리, 감정의 유비를 연결한다. 다만 색과 화성과 인지의 유비는 과학이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 일단 물리적으로는 주파수의 체급 차이가 너무 크고, 각 대상이 파동과 주파수로서 본질적으로 다르며 지각하는 기관조차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그 사이의 공통적인 규칙과 비율을 토대로 유사성을 연결하고 공감각의 개념을 발견했다. 신경학적으로 공감각을 느끼는 극소수가 그 세계를 독점하지 않고, 보편적 이론을 만들어 합의하며 발전시켜갈 수 있는 예술계의 매뉴얼, 약속을 만든 것이다. 색은 물리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인지하는 것이다. 색채학은 이러한 약속의 산물이다.
하물며 시간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지금 내가 올려다본 하늘의 별빛을, 우연처럼 비치는 그 별빛을 수천 년 전에 예비하신 약속의 증표로 삼으셨다면 이것이 과연 불가능한 일일까?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성립된다. 2,000년 전 성경의 역사가 쓰이던 그 시기에 출발한 어느 별의 빛이 오늘 내 눈에 닿는 기적처럼 말이다.
딸아이가 아장아장 걸을 때, 카페에서 계단 구조를 인지하지 못하고 허공으로 발을 내딛는데도 마치 평지를 걷듯 자연스럽게 잡아주었던 기억이 있다. 무심하게 아이를 지키는 아빠들의 흔한 특성이겠다. 아이는 아마 떨어진다는 감각조차 없었을 것이다. 인간조차 어른과 아이의 인지에 따른 시야가 이토록 다르다.
중학생 시절 밤하늘의 별을 보며 사춘기를 겪던 기억이 난다. 밤하늘은 우주를 의식하게 하는 창이었고, 그 거대한 존재가 느껴질 때마다 저곳에서 이쪽을 보고 있을 수도 있다는 그 가늠할 수 없는 대비가 무척 혼란스러웠다. 별의 언약은 상대적으로 가장 큰 존재감을 느끼게 해주며, 시간축이 서로 다른 존재가 함께할 수 있다는 거의 유일한 가시적인 증거다. 무지개 언약과 별의 언약 모두 무척 낭만적이면서 과학적이고 무엇보다 대단히 경외롭다.
무지개는 프리즘을 통해 내 손안에 선명히 담을 수 있는 거리인 반면, 별빛은 결코 닿을 수 없는 거리에 있다. 이 현기증 나는 격차를 통해 약속하신다는 것, 그것이 가늠할 수 없는 하나님이 내 손을 잡아주시는 언약의 증거라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창세기는 은하계 너머에 계시면서도 빛이라는 질서로, 말씀으로 내 손을 잡아주시는 그분의 거대하고 본질적인 이야기다. 인간의 한계를 인정한다는 것은 곧 우리의 인지적 한계를 직시하는 일이다. 우리가 담는 빛의 총량이 실재에 비해 얼마나 좁은지, 뇌가 안심하기 위해 빈틈을 채우는 본능이 얼마나 강력한지 자각하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실재를 신이라는 존재로 채우려는 것이 인간의 기제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조차 나는 기꺼이 나의 한계로 수용한다. 그럼에도 내가 성경에서 오류를 찾지 못하고 마음을 빼앗기는 이유는 이 거대한 서사가 내 직관 속에서 가장 선명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밤하늘을 올려다볼 때 느끼던 현기증처럼, 가늠할 수 없는 하나님의 빛이 다시 내게 도달했다. 이번에 별의 언약 구절에 한참을 머무르며, 마치 별을 보며 현기증을 느끼던 중학생 시절로 돌아간 것 같다.
기도
하나님아버지,
아브람은 별의 언약 직후 그 빛을 보고 반응하였고, 하나님은 그것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별의 언약을 대하는 나의 반응이 그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의'로 느껴지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_에세이 [성경의 서사] > 창세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천사는 성 밖에서 온다. (경계의 자유의지) 창세기 18~20장 (1) | 2026.01.29 |
|---|---|
| 보상이 아닌 소망의 기대. 창세기 16~17장 (0) | 2026.01.28 |
| 설득자가 아닌 관찰자. 창세기 13~14장 (1) | 2026.01.23 |
| 수평적 확장과 수직적 교만. 창세기 10~12장 (0) | 2026.01.19 |
| 색채와 쉼. 창세기 8장-9장 (1) | 2026.01.16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