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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상이 아닌 소망의 기대. 창세기 16~17장 본문

묵상_에세이 [성경의 서사]/창세기

보상이 아닌 소망의 기대. 창세기 16~17장

집사 K 2026. 1. 28. 21:59

16장에서는 아브람의 불신 섞인 선택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하갈과의 관계를 통한 자녀 출산, 그로 인한 사래와의 갈등, 그리고 도망과 하나님의 도움. 이는 하나님의 언약을 온전히 신뢰하지 않은 결과들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토록 인간적인 곤경에 처한 순간에도, 그분을 구할 때 기꺼이 손을 내미신다.

17장은 어쩌면 일방적일 정도로 몰아치는 하나님의 계획 실행이다. 아브람이라는 이름이 '아브라함'으로 변경된다. 이는 선언과도 같은 은혜다. 아브라함은 여전히 불신의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길을 열어주시며 재차 언약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하신다. 할례의 규칙을 주시고, 사래를 '사라'라 명명하며 복을 약속하신다.

 

신뢰는 남을 바꾸는 큰 동력

옆에서 보면 불공정해 보이기도 하나, 당사자 입장에서는 이러한 '지속적인 신뢰'야말로 결국 사람을 바꾸게 하는 가장 큰 동력이 된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말씀 묵상을 그리 가까이하지 않을 때조차, 나를 유독 좋게 봐주고 인정해 주는 분의 기대를 경험한 적이 있다. 한두 번의 인정이었지만, 나를 화끈하게 믿어주는 듯한 그 신뢰감이 이후 내 행동에 변화를 주었다.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을 들게 했고, 그분의 기대에 맞는 사람이 되고 싶어 꾸준히 노력하게 된 동력이 된 것은 사실이다.

의외로 종종 맥락에 맞지 않는 무례한 말을 가볍게 던지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내가 하는 것 이상으로 나를 기대해 주는 사람도 있었다는 사실을 이 말씀이 기억나게 했다. 하물며 하나님의 기대를 받는 아브라함은 어땠을까.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해 기대하는 것과 비슷하다. 흔히 기대에 부응하지 않을 사람에 대해서는 포기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기대는 대개 '나에 대한 그 사람의 행동'에 국한된다. 이제는 나와의 관계를 전제로 하지 않는, '타인 그 자체'에 대한 기대를 회복해야 할 것 같다.

 

보상이 아닌 소망의 기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다는 것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 그분의 특성을 해석하고 적용해 보는 일일 것이다. 나와의 관계 개선이 목적이 아니라면, 설령 포기하는 것이 마땅해 보이는 상대라도 그저 그의 구원과 잘됨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오히려 부담이 적을지도 모르겠다.

타인 그 자체에 대한 기대는 역설적으로 내가 그에게 기대하지 않게 되는 일이다.

기대하지 않는 것은 '포기'와 다르다. 내 기대에 부응하지 않았다고 해서 서운해하지 않는 상태를 말하는 것 같다. 그럴 때 다툼도 미움도 적어지고 용서가 어렵지 않으며, 비로소 회복이 일어난다. 누군가의 자유를 더 이상 불편해하지 않을 만큼, 내 마음이 더 여유로워지기를 바란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그동안 타인에 대해 가졌던 기대는, 내 중심의 대가나 보상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제는 상대에게 '소망'으로서의 기대를 품기를 원합니다. 이 마음의 평안이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비롯되기를 바라며, 나 또한 누군가에게 소망으로서 존재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