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의 문맥

인식의 불균형에서 오는 권력 구조. 창세기 42장 본문

묵상_에세이 [성경의 서사]/창세기

인식의 불균형에서 오는 권력 구조. 창세기 42장

집사 K 2026. 5. 30. 18:53

'요셉이 보고 형들인 줄을 아나 모르는 체하고 엄한 소리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 
요셉은 그의 형들을 알아보았으나 그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하더라' (창세기 42:7-8)

이 장면에서 요셉에게 주도권이 생긴다. 
이는 신분의 차이가 아닌, 서로 인식의 격차에서 오는 권력 차이다. 
상대의 패를 모두 알고 있는 자와 그 사실을 모르는 상대의 구도다. 
이 지점이 흥미로워서 원어를 찾아보니, 원어에서 '알아보는 것'과 '모르는 척하는 것'은 같은 단어다.

'나카르'
1. 인식하다, 인정하다.
2. 숨기다, 다른 사람인 것처럼 가장하다.

이는 인식하는 주체가 자신을 은폐할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상대를 알지만 상대가 나를 모른다는 것은 나를 감출 수 있음과 동시에 상대를 속일 힘을 갖게 됨을 뜻한다. 속인다는 것은 진실을 모르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상대를 자신에게 종속시킬 수 있는 권력 구도를 가능하게 한다. 
정보를 선점한 집단이 나머지를 지배하는 구도는 역사와 현실에서 볼 수 있다.

얼마 전 본문이었던 야곱을 대하는 라반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결혼 풍습이라는 정보의 비대칭을 이용하여 야곱의 결혼 상대까지 조작하고 20년 동안 노동을 착취했다. 라반은 야곱을 영원히 지배하려 했다. 
권위주의적 종교 지도자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예수께서 종교 지도자들에게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서 자신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막았다'며 비판하셨던 사례가 이에 해당한다.

요셉은 형들을 알지만 형들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함을 이용해, 통역사까지 대동하며 형들을 철저히 속인다. 
요셉이 권력 추구형 인물이었다면 형들과의 격차를 벌리며 지배하는 방식으로 복수했을 것이다. 그러나 요셉은 정보 비대칭의 권력 구조를 이용하면서도, 자신을 버렸던 형들이 이제 다른 막내 동생을 어떻게 대하는지 시험한다.
이 의도를 보면 요셉은 권력을 지배의 수단으로 쓰지 않는다. 격차를 고착화하지 않고, 오히려 상대가 자신의 위치까지 올라오도록 조력하는 데 권력을 사용한다. 원수 같은 관계에서 지배를 선택하지 않고 공동체 질서의 회복을 위해 권력을 정교하게 사용한 것이다. 
형들은 정직을 호소했으나 곧 자신들의 거짓된 내면을 거울을 보듯 마주한다. 감옥에서 그들은 과거에 버린 요셉을 만난다.

“우리가 우리 아우에게 행한 일로 말미암아 환난을 당하는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원할 때에 우리가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환난이 우리에게 임하였느니라”(창세기 42:21)

무의식 속에 잠자던 죄책감이 의식의 영역으로 올라오며 회개의 발판이 마련된다.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섭리가 느껴질 때, 그 시선으로 공동체를 보면 관계를 바라보는 마음이 달라진다. 가끔 입장 차이와 갈등으로 상대에 대해 기대하지 않고 포기하는 차가운 시선이 생길 때가 있다. 하지만 말씀을 묵상하며 그들을 향해서도 기도의 대상으로 바라보며 마음이 녹는 것을 경험한다.

요셉이 형제들의 변화를 기다리며 권력을 사용했던 것처럼, 나 또한 서운했던 상대를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강한 섭리를 기대하며 기도할 수 있다.
요셉이 흘린 눈물은 단순한 연민이 아니었을 것이다. 형제들의 변화를 감지하며 자신이 조력한 대상이 실제로 변화하는 모습을 마주한, 깊은 감동과 감사의 고백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만큼, 하나님의 섭리에 맞게 기도하며 조력하는 가운데 가족의 회복이 가능하다는 강한 희망을 본다.
가족을 향한 기대의 회복과, 잊었던 감사와, 무엇보다 기도 조력자 모두가 평안하기를 기도한다.

“요셉이 그들 앞에서 물러가서 울고 다시 돌아와서 그들과 말하다가”(창세기 4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