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의 문맥
악한 의도 위에 덮이는 선한 의도. 창세기 50장 본문
야곱이 숨을 거둔다.
인간적인 계산과 용의주도함으로 축복을 붙잡으려 했던 인생. 축복을 얻기 위해 속이고 도망쳤으며, 늘 긴장 속에서 자신의 계획을 놓지 못했던 사람. 죽은 줄 알았던 아들이 살아 돌아오며 마침내 긴장을 내려놓고, 목가적인 풍경 속에서 노년을 보내던 그가 축복을 남기고 생을 마감했다.
야곱이라는 인물을 떠올려 보면, 축복에 대한 갈망과 수많은 계획, 그리고 용의주도함의 이미지가 있다. 그러나 그의 삶을 끝까지 따라가다 보면 그 위에 하나님의 선한 계획이 한 겹 한 겹 쌓여 가는 모습 또한 보게 된다.
애굽 사람들은 요셉의 가족과 함께 70일 동안 애도했다. 요셉은 형제들과 함께 가나안 막벨라 굴에 야곱을 장사지내고 다시 애굽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형제들은 아버지가 죽자 요셉이 자신들에게 복수할까 봐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그래서 야곱의 유언을 거짓으로 전한다. 요셉은 그 말에 눈물을 흘리고 화평을 약속한다.
시간이 지나 요셉 또한 생을 얼마 남기지 않게 되었다.
그가 죽기 전 형제들에게 말한다.
“나는 이제 죽지만, 하나님은 반드시 너희를 돌보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들이실 것이다.”
요셉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맹세하게 하며 말한다.
“하나님이 너희를 찾아오셔서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실 때, 내 유골을 여기서 메고 나가라.”
꿈꾸는 소년 요셉이 110세에 생을 마감했다.
요셉의 인생은 겉으로 보면 다이나믹한 역전극 같지만, 한편으로는 상황에 흔들리면서도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았던 평안한 삶이었다.
애굽 사람들은 그의 시신을 방부 처리하여 관에 넣고, 그 약속의 날을 기다리게 했다.
형제들이 거짓 유언을 전했을 때 요셉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이 창세기 50장 20절의 구절을 원어 중심으로 살펴보면 번역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 반복이 보인다. '생각하다', '계획하다', '의도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히브리어 '하샤브'가 같은 문장 안에서 반복된다.
이 관점에서 앞선 구절을 다시 보면 '계획'에 담긴 의미가 깊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계획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을 위하여 계획하셨다.”)
형제들은 요셉을 죽이려는 악한 의도(생각, 계획)로 그를 구덩이에 던지고 노예로 팔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계획에 선한 계획을 덮으셨고, 결국 요셉을 통해 많은 사람의 생명을 보존하게 하셨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악한 의도를 삭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위를 더 크고 선한 의도로 덮어주시는 것이다. 덮는다는 것은 모른 척하는 것이 아니다. 죄를 직시하게 하면서 용서와 구원으로 인도하시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형제들은 이미 용서를 경험했음에도 과거의 죄와 두려움이 떠올라 거짓말로 자신을 보호하려 했다.
한 번의 회개가 죄를 완전히 삭제하지는 못한다. 창세기는 반복해서 인간의 연약함을 보여주며, 그 배경 위에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이야기의 갈등을 보면서 메시지가 어렵지 않게 예측되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성경의 구조가 이해되는 만큼, 오히려 놓치고 있는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인간의 넘어짐을 너무 쉽게 수긍하는 태도이다.
최근 묵상을 하면서 그런 장면마다 (회개했던 인간의 넘어짐에도 약속이 이루어짐 = 하나님의 신실함) 이것을 당연한 공식처럼 받아들이며, 내가 인간의 회개의 진정성을 가볍게 지나쳐 버리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결국 또 넘어졌구나"라는 결론으로 정리하기에는, 형제들이 보여 주었던 회개와 변화 또한 분명 진심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비록 순간일지라도 인간의 그 진심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신다. 그 순간의 진심은 가볍지 않다.
인간은 넘어질 수 있다. 그러나 다시 일어서게 하는 것은 그가 과거에 주님을 만났던 기억이라고 생각한다.
요셉은 형제들의 거짓말을 알면서도 다시 한번 그들을 안심시킨다. 그 근거는 형제들의 인격이 아니라, 그들을 향한 요셉의 사랑이다.
말씀은 나의 불완전하고 흔들리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계속 붙들어 주신다.
붙들어 주시는 그분의 손을 다시 붙잡는 것이 내 묵상의 의미가 된다.
창세기와 요한복음이 이렇게 마무리되는 시점에 지난 5개월간의 묵상을 돌이켜본다.
나는 나를 흔드는 선하지 못한 생각들을 말씀 앞에 가져갔다.
그리고 언제나 하나님이 품으신 선한 의도는 흔들림이 없었다.
일상에서 틈틈이 말씀의 의도를 생각했다.
내 불완전한 생각 위에 그분의 선한 생각이 쌓이기를 간절히 원했다.
지난 기간 말씀을 통해 가장 크게 바뀐 점은, 나의 연약함과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의 연약함을 피하지 않고 마주하려고 하는 점이다.
자신은 없지만, 확신은 든다.
그래서 더욱 말씀의 생각이 내 생각 위에 매일 조금씩 쌓이며 내면화되기를 바란다. 나를 설득하시는 성령님과 기도해 주시는 공동체에 감사를 드린다.
[에필로그]
지난 창세기와 요한복음을 돌아보면, 몇 개의 장면들이 보인다.
돌밭에 누워 바라보던 밤하늘. 이미 거할 곳이 준비되어 있음을 알게 된 베델의 밤.
보이는 무지개를 통해 보이지 않는 마젠타를 상상하듯, 그려본 현실 너머의 색.
다리를 저는 동생의 모습에서 신적인 위엄을 알아챈 사냥꾼의 본능.
곧 사라질 성문에 걸터앉아 있던 조카의 시선 끝 깊은 어둠을 가르는 황금빛 존재.
이성적으로 질문했던 남자와 감각적으로 고백했던 여자에게 동시에 주어진 십자가의 통찰.
그 외에도 많은 요한복음과 창세기의 현장이 빛나는 색과 불어오는 향기로 기억된다.
지금 밤하늘에 보이는 별빛은 수천 년 전 성경을 기록하던 누군가의 하늘에서 빛나던 별빛이기도 하다. 비유가 아니다.
또한 빛의 본질은 온기에 가깝다.
빛은 늘 따뜻하지만,
바람은 늘 다른 모습으로 불어온다.
모리아산의 건조함처럼 긴장과 침묵을 품기도 하고,
생선 굽는 연기처럼 위로와 회복을 전하기도 하며,
요셉을 밀어 주던 열기처럼 기대와 설렘을 품기도 한다.
고센 땅의 흙내음처럼 긴장을 풀어 주는 쉼이 있다.
그 바람은 시대와 공간을 넘어 불어온다.
그리고 나는 그 바람이 부르심과 닮아 있다고 생각한다.
야훼,
여호와를 부르듯 숨을 쉬고,
쉼을 주듯 사람을 부르신다.
고개만 돌리면 이미 함께 하신다.
약속을 잊은 사람도 포기하지 않고 부르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고린도전서 1:1)
이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따라가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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