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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의 문맥
요한복음 8장에 담긴 의미의 깊이 때문에, 그날 사건의 전말에 대해 먼저 다루고(1부), 왜 그리고 어떻게 된 일인지에 대해서(2부) 구분하여 정리하였습니다. 1부: 큰 서사 속 빗나간 화살. 요한복음 8:42-59 유대인들과 예수님은 소속이 다르다. 예수께선 인간의 근원적 결함을 직시하신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8:44) 예수께서는 인간이 본래 사망과 거짓을 따르는 조상 아래 있음을 폭로하신다.인류의 첫 후손인 가인이 동생을 죽였던 것처럼, 사망을 기원으로 삼는 자들은 필연적으로 죽음의 흐름에 휩쓸리게 된다.이것이 진리를 따르기 위해 '위로부터의 거듭남'(요한복음 3장)이 필요한 이유이다. 본래 영생하시는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그분의 형상을 품었던 ..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31-32절 이번에는 자유에 대해 언급된다. 예수님 안에 거할 때, 즉 예수님의 말씀을 씹어 소화하여 내면화하는 '트로게인'을 지속할 때 진리를 알게 되고 자유롭게 된다. 이에 대해 유대인들은 누군가의 종이 아니라는 이유로 이미 자유롭다고 말한다. 의지대로 행동할 수 있는 상태를 자유로 인식하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진리의 종이 되었을 때 비로소 자유롭게 된다는 관점을 제시하신다. 진리에 의한, 죄로부터의 해방이다. 즉 자유는 의지에서 오는 게 아니라, 진리가 들어왔을 때 가능하다.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라." 37절이 말씀은 ..
여기서는 죄가 언급된다. 요한복음이 이제 죄에 대해 정의하는 것일테니, 이제 죄와 관련된 구절 속으로 들어가 머무른다. 21절: "내가 가노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단서: '죄 가운데 죽는다.' 여기서 죄 때문이 아니라, '죄 가운데'라고 한다. 그렇다면 죄는 어떤 (비도덕적) 행위의 인과율이라기보다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좌표, 기준, 방향, 혹은 공간의 의도를 드러낸다. 이어 나오는 유대인들의 대답은 예수를 향해 "자결을 하려고 하느냐?"라고 묻는다. 맥락상 유대인들의 답변은 죄에 대한 전형적인 하위 차원의 설명일 것이다. 닿지 못하는 곳에 가는 것이 자결인가? 그것은 아마 비아냥일 것이며, 당시 자살이 가장 큰 죄로 인식되었음을 고려하면 ..
인간들은 신의 섭리인 심판을 자행하려 하고, 신은 오히려 용서를 한다. 인간의 시신경은 타인의 죄를 선별적으로 받아들이며, 뇌는 단죄를 통해 스스로 심판자가 되기를 갈망한다. 심판자의 특징은 심판을 수행하는 자신은 죄가 없다는, 혹은 심판이라는 행위 자체가 죄와 양립할 수 없다는 착각에 빠지는 것이다. 신은 용서라는 가장 큰 사랑을 통해, 신이 되고자 했던 인간에게 인간성의 회복을 권한다. 예수님의 몇 마디 말씀과 제스처는 그들을 심판자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만든다. 그 자리는 본래 신의 자리도 아니었을, 괴물의 위치였겠지만. 상위 차원의 심판과 하위 차원의 용서라는 역할이 뒤바뀐 채 스스로 심판자가 되려는 인간을 신의 사랑이 보호하시는 사건이다. 그 몇 마디와 제스처는 개인적으로 요한복음 내에서도 숨 죽..
교회의 정체성은 한 아버지를 둔 형제 즉 가족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교회는 세상에서 외면받는 이들을 조건 없이 품는 최후의 보루다. 질병, 장애, 경제적 결핍 등 세상의 잣대로는 결격 사유가 될 것들이 교회 안에서는 사랑과 긍휼의 대상이 된다. 이것은 기독교 공동체가 가진 바람직한 가치다. 하지만 이 수용성은 역설적으로 사회적 규범과 예의를 학습하지 못한 이들에게 방종의 공간을 제공한다. 사회에서는 도태될 무례함이 신앙이나 가족이라는 허울 아래 용인되기 때문이다. 가족 같은 회사, 일자리라는 약점을 인질삼아 상사의 선넘은 행위가 사내 문화가 된 회사를 풍자하는 말이다.일반적인 사회 모임은 무례한 사람을 피해 떠나면 그만이지만, 교회는 신앙과 삶이 결착된 곳이라 떠나는 행위 자체가 영적 터전을 잃는 리스..
1. 예수님은 성전에서 유대 사람들이 놀랄 만한 학식을 보이신다.그러나 유대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기득권과 성공의 경험 때문에 시스템의 부족함을 못 본 척 수호하려 한다.이는 오판이라기보다 의지를 가진 거부이다. 그들이 예수의 가르침에서 경외심을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거부했다는 점이 그 근거다. 특히 유대인들은 예수를 부인하기 위해 '갈릴리'라는 지역에 집착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아버지께로부터 왔음을 선언하며 지상의 하위 차원 '출신'을 상위 차원의 '기원'으로 덮어버리신다.체포하려는 시도 역시, 하위 차원에서는 물리적인 '구속'을 꾀하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상위 차원의 '돌아감'으로 연결하신다. "내가 있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는 말씀은, 하위 차원의 체포 시도가 결코 가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