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의 문맥
1화 [기적 1부] 기적 신앙에 따라오는 ‘일단’에 대한 고찰 본문
믿음의 문턱, ‘일단’을 넘는다는 것
“믿습니까?”
교회 안에서는 종종, 성도를 향해 믿음을 촉구하는 질문이 던져진다.
누군가에겐 고백을 이끌어내는 말이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겐 빠른 결단을 요구하는 조용한 압박으로 다가온다.
특히 성경 속 기적이 언급될 때는, ‘일단’ 믿지 않으면 신앙을 지속하기 어렵다는 전제가 따라붙는다.
기적처럼 비현실적인 사건 앞에서, ‘일단 믿음’은 때로 사고를 멈추고 결단하라는 메시지로 받아들여지곤 한다.
그러나 ‘일단’이라는 말은 단순한 회피도, 무조건적 순종도 아니다.
그것은 논리보다 신뢰를 먼저 선택하는 결단을 의미한다.
성경을 보면, 예수를 완전히 이해한 뒤에 따랐던 사람은 많지 않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 도마, 베드로. 그들은 먼저 동행했고,
그 이후에야 예수를 알아보고 이해했다.
부활 신앙은 논리의 결과라기보다,
길을 걷고 떡을 떼며 상처를 보는 ‘동행의 경험’ 속에서 자라났다.
이것이 ‘일단’이라는 말이 품고 있는 신뢰의 깊이다.
신뢰할 만한 분 앞에 서는 결단의 순간, 그것이 일단 믿음의 시작이다.
믿음과 이성은 때로 긴장 관계에 놓이지만, 이성은 믿음의 반대가 아니다.
성경의 인물들 또한 의심하고 질문했다.
질문 속에서 길을 찾았고, 때론 실수를 통해 믿음에 이르렀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질문을 던지셨지, 즉답을 강요하거나 의심을 정죄하지 않으셨다.
“어찌하여 의심하느냐?”, “무엇을 원하느냐?”
그 물음들은 사고를 멈추게 하기보다, 오히려 믿음이 자라날 공간을 여는 말이었다.
성경은 믿기 어려운 순간을 통과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예컨대, 기적을 목격하고도 침묵하거나 낙심한 자들, 예수 곁에 있었지만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던 제자들.
예수는 그들을 밀어내지 않으셨다.
성경은 맹신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묻고, 깊이 생각하고, 기억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이 모든 장면을 논리로 증명하라는 뜻은 아니다.
모든 것이 납득된 후에야 움직이려는 태도는,
오히려 신앙의 문 앞에서 영원히 멈춰서는 이유가 되곤 한다.
신앙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다.
모든 것을 다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신뢰할 만한 근거를 발견했을 때 비로소 시작된다.
그런 의미에서 진리를 믿는다는 것은, 어쩌면 사랑을 시작하는 일과도 닮아 있다.
이해의 끝자락에서, 그분의 목소리가 조용히 들려오는 듯하다.
“지금까지 들은 것만으로도, 나를 신뢰할 수는 없겠니?”
믿음은 맹목이 아니라, 관계에 대한 신뢰다.
들으려는 자에게 들리고, 두드리는 자에게 열릴 것이다.
이 글은 누가복음 마지막 장을 묵상하며 사유한 기록이다.
예수와 동행하며 말씀을 듣고, 떡을 떼는 순간 비로소 눈이 밝아졌던 그 장면처럼,
믿음은 이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동행 속에서 자란다.
믿음은 납득의 결과가 아니라, 신뢰할 만한 분 앞에서 먼저 반응하는 데서 시작된다.
누가복음 18장에 등장하는 어린아이, 세리, 맹인.. 그 누구도 설명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만 “지금 이 분이라면 신뢰할 수 있다”고 여겼다.
바로 그 반응 안에서, 진리가 열리기 시작한다.
이 글의 원형: 누가복음 18장 묵상

동행의 경험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길을 함께 걷고, 말씀을 듣고, 떡을 나눌 때
비로소 눈이 열렸다.
예수는 지식의 대상이 아니라,
동행 속에서 드러나는 분이다.
그는 길 위에 함께하시는 주님,
그리고 길 그 자체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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