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의 문맥

모순의 땅. 요한복음 4장 본문

묵상_에세이 [성경의 서사]/요한복음

모순의 땅. 요한복음 4장

집사 K 2026. 2. 12. 06:00

"참되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을 찾으신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요한복음 4장 23절~24절)

0. 예배의 본질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 헤매는 것이 예배의 시작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실은 하나님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한 사람을 찾고 계신다는 역설을 발견한다. 결국 예배는 의무나 의식이 아니라, 영이신 하나님과 인간의 영이 만나는 인격적인 관계이다.

1. 시스템 안팎의 갈증
니고데모가 시스템 중심의 수혜자였다면, 사마리아 여인은 시스템 밖의 피해자였다. 그러나 둘의 공통점은 실존적 갈증을 느끼고 있다는 점이다. 시스템 안팎에서 발생하는 이 갈증은 주님과 연결되는 하나의 신호일지 모른다. 예수님은 사마리아를 ‘반드시 통과하여야 하겠다’는 의지를 보이셨다. 갈증이 있는 곳에 생명수이신 예수께서 직접 찾아가신 것이다. 이는 형식보다 진리를 갈구하는 심정이 있는 곳에 성령이 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2. 하위 시스템의 해체
예수께서 먼저 물을 달라 요청하시며 물이라는 화두를 꺼내신다. 사마리아 여인은 유대 사람이 자신과 상종하는 것을 보고 놀란다. 먼저 유대민족이 사마리아를 배척한 이유에는 나름의 입장이 있다. 역사적으로 북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과정에서 사마리아 민족은 여러 민족이 섞이게 되어 배척받게 되었다. 갈등은 더욱 깊어지며 서로 다른 성전을 세우기까지 하며 물조차 나누지 않는 골이 생겼다. 이것은 유대의 고착화된 시스템이다. 사마리아는 유대와 갈릴리 사이 갇혀 점차 고립되어가는 신세였다. 예수님은 이런 관계적 구조를 혁신적으로 재정리하신다.

야곱이 만든 우물은 그 지역 사람들의 현실 생활을 개선하는 역할을 하였지만, 예수께서 제공하는 물은 영생토록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라 말씀하신다. 여인은 이 물을 주시기를 간구하며 반응한다.

3. 인풋과 아웃풋
물의 비유 이후 양식의 비유를 하신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일을 이루는 것이다. 곡식은 추수할 때가 되었고, 추수하는 사람은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거둔다. 심은 사람과 거두는 사람이 다르다는 말씀은, 타인의 수고로 만들어진 결실(아웃풋)에 참여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여인의 증언을 계기로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곧 말씀을 직접 듣고 세상의 구주임을 알게 된다. 하위 시스템의 경계를 넘어 상위 시스템인 주님과의 동행을 통해 영생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4. 모순의 땅
수확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받아들이는 땅의 상태, 즉 당사자의 마음 상태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농부는 씨를 흩뿌린다. 성령으로 비유되는 바람의 흐름을 예측할 수 없듯, 씨앗은 누구에게나 뿌려지지만 어느 경로로 오는지는 알 수 없다. 인풋(씨앗)은 동일하되, 마음 밭에 돌이나 가시넝쿨이 있는지에 따라 아웃풋(수확)이 결정된다.

증언자는 씨앗을 뿌리고, 빛과 물은 그 씨앗이 자라날 수 있는 원천이다. 그러나 빛의 길을 따르거나 그늘진 돌무더기 속에 남는 것은 결국 땅(자기 자신)의 결정이다. 3장에 이어 빛 앞에 향방을 결정하는 주체는 나 자신이다.

마음 밭을 스스로 망치는 것에 대해. 
종교의 형식이 본질을 방해하는 것에 대해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것은, 건강한 신앙일 수 있다. 그러나 증언자의 전달 스타일이나 일부 부도덕한 종교인의 사례를 전체의 대표 사례로 삼아 진리 자체를 거부하는 기준을 세우기도 한다. 엊그제 SNS 지인이 '종교에 매몰되어 가정을 돌보지 않는' 사례를 공유하며, 이런 이유로 교회에 열심인 사람과는 업무적으로 상종하지 않는다고 말한 경우가 있었는데, 이것이 스스로 밭을 망치는 대표적인 예다. 부분의 특성을 전체의 속성으로 단정 짓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에 해당한다.

또한 어떤 메시지의 가치를 판단할 때 그 내용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어디서 왔는지, 즉 전달자에 대한 출신과 편견을 근거로 진리 자체를 무시하는 경우도 많다. 요한복음 4장 44절에 예수님조차 "예언자는 자기 고향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한다" 하셨다. 이런 유형의 사람들은 자기가 잘 아는 사람 혹은 자기보다 아랫사람이라고 느끼는 상대가 하는 말에 대해서는 신뢰나 권위를 부여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한편으로는 심리적으로는 무언가를 회피하기 위해 부정적인 사례를 방어기제로 사용하는 공격적 회피가 느껴지기도 한다. (회피가 공격성을 띠는 이유는 그만큼 내면의 불안이 반영된 것이 아닐까.) 스스로 마음 밭에 돌을 쌓아 씨앗이 뿌리 내리지 못하게 원천 차단하는 것을 넘어, 남의 땅에 돌을 던지는 격이다. 깨어있는 것처럼 보이고 싶어 하지만 실상은 깨질 틈이 없는 너무나 단단하게 굳어버린 돌밭의 상태다. 물론 종교 시스템이 본질을 벗어난 사례들에 대한 비판은 정당하다. 앞선 예시처럼 종교 활동에 매몰되어 가정 내 섬김이라는, 본질인 사랑을 놓치는 것 또한 우선순위의 오류다. 

본문을 읽으며, 배척의 원인을 남 탓(그것이 충분히 부당하다고 해도)으로 돌리는 것에 대해 돌아보았다. 
물론 마음 밭이 좋다는 것이 무조건적인 수용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무분별한 수용은 좋은 씨앗뿐 아니라 나쁜 씨앗에게도 시달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본질을 보고 현실을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기적을 보기 전에 결코 믿지 않는 것을 문제 삼으시고, 말씀에 대한 믿음의 반응이 기적을 일으킨다는 것을 보이셨다. 그 수혜를 받은 자는 다른 무엇보다 믿음으로 진정한 빛을 수용하는 마음을 지녔을 것이다.

잘못된 시스템은 이미 예수님께서 문제 삼으셨다. 그리고 행위자가 주체적으로 심판과 구원의 길을 걷는다고 하셨다. 남의 행동에 나의 선택이 바뀌지 않는 무게를 가지고 싶다. 타인의 결함을 이유로 신앙을 거부하는 행위는 결국 나의 구원의 키를 '무례한 타인'에게 상납하는 모순이다. 눈에 거슬리는 어떤 대상의 문제를 도구 삼아 내 마음 밭에 스스로 돌을 쌓기보다, 진정한 빛을 수용할 수 있는 정돈된 땅의 상태를 유지하는 여유와 지혜를 구한다.

예전에 '말이 통해야 일이 통한다'라는 책을 읽다가 깊이 공감한 내용을 메모해 두었는데 말씀을 나에게 적용하는데 도움이 되는 연결점이 있어서 옮겨본다.

-책 '말이 통해야 일이 통한다'에서 발췌-
'어느 누구도 우리를 화나게 할 수 없다. 우리가 화가 난 것뿐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화가 날 수는 있지만, 상대가 우리에게 화를 내게 해주진 못한다. 화가 났을 때 원인이 상대에게 있다고 믿을수록 반드시 상대가 무언가를 해줘야만 화가 풀린다고 믿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 감정의 주인은 상대가 된다. 열쇠를 상대에게 넘겨주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분노와 화는 상대가 무언가 해줘야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를 더욱 잘 보살필 필요가 있는 감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