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의 문맥
피해자 서사. 요한복음 5장 본문
1. 어쩔 수 없다는 말
자비의 집이라는 의미의 베데스다는 유대 성전 바깥, 즉 주류 시스템에서 소외된 자들이 모인 곳이다. 그러나 이곳의 실상은 냉정한 무한경쟁의 현장이다. 사실 38년 된 병자가 치유받지 못한 것은 개인의 나태함보다, 약자가 결코 이길 수 없도록 고착화된 사회 시스템의 결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사정(나를 넣어줄 사람이 없음)은 '어쩔 수 없다'는 포기의 명분을 스스로 확고히 하는 것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자신의 한계를 스스로 규정하고 있는 태도 때문이다.
2. 학습된 피해자 서사
가난의 답습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본 기억이 난다. 대물림되는 빈곤 속에 놓인 이들은 나중에 실제적인 기회가 찾아와도 그것을 거부하곤 한다. 그리고 자식들에게도 본인의 선택에 대한 정당성을 유지하기 위해 비슷한 선택을 학습시키는 것을 보았다. 오랜 결핍이 기회를 포착할 의지와 판단력조차 마비시킨 것이다. 본문 속 병자에게는 장애라는 거대한 벽이 그 무기력에 정당성을 더해주고 있지만, 결국 이 또한 학습된 결과이다.
아무리 나름의 정당한 사정과 입장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병자'라는 결과(상태)를 바꾸지 못한다는 것이 냉정한 진실이다. 시스템의 부조리를 탓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그를 일으켜 세울 수 없다. 나는 병자의 말을 들으며 안타까움과는 별개로, 그가 삶의 이유를 타인과 사회 탓으로만 연결하며 본인의 피해자 서사에 매몰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했다. 환경적 요인에 과몰입하여 '내가 포기해도 되는 이유'를 만드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 시스템에 안주하게 만드는 강력한 방어기제가 된다. 광야에서의 38년은 이전 세대가 모두 교체되는 데 걸린 시간으로 볼 수도 있다. 이 대물림을 뿌리째 뽑기 전에는 변화시키기 힘든 서사이다.
3. 동적 주체성
예수께서 치유하시는 대상은 주로 맹인이나 앉은뱅이다. 이는 현실적으로 치명적인 장애이나, 상징적으로는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것'과 '주체적으로 일어나 움직이는 것'에 대한 서사이다. 외부 요인에 함몰되어 피해를 증명하는 데 에너지를 쏟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으로서의 '직무유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자기 땅에 쌓인 돌들을 치워야 할 주체가, 시스템의 부조리를 탓하며 돌무덤의 크기를 측량하고 있다. 예수님이 등장하기 전까지, 그의 주체성은 주저앉은 채 38년 동안 결코 될 수 없는 베데스다의 1등만 바라보며 로또의 확률만 의지하고 있었다.
4. 상위 차원의 초대
예수께서는 그에게 "나을 의지가 있는지"를 물으신다. 이는 시스템의 부조리를 해결해달라는 요청에 대한 답이 아니라, 시스템의 한계을 뛰어넘는 상위 차원의 제안이다. 구원의 실체인 예수를 마주하고도 여전히 환경의 한계를 핑계 삼는 것은 이제 환경의 문제가 아닌 주체 본인의 선택 문제다. 상위 시스템의 문이 열렸음에도 하위 시스템의 피해자 서사에 머물기를 고집한다면, 그것은 스스로를 학습된 무기력 속에 가두는 행위이다.
5. 시스템에 마비된 모든 계층
이러한 관점에서 율법이라는 하위 시스템을 수호하느라 본질을 박해하는 유대 지도자들도 구원의 대상에서 멀어져 있다는 측면에서 이 병자의 기존 삶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지도자들은 시스템의 강자로서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눈앞의 주님을 알아보지 못한다. 두 부류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시스템에 마비되어 있었지만, 병자는 예수님의 초대에 응하고 유대 지도자들은 초대를 거부한다. 이는 결핍(을 추구하는 것)보다 소유를 추구하는 것이 더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6. 주체성의 회복
결국 생명으로 걸어가야 하는 주체는 각자 자신이다. 사회적 시스템의 불합리함은 여전히 유효할 수 있으나, 시스템의 차원을 넘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대가 시작되었다. 예수님을 통해 영적 쾌적성을 얻게 된다는 것이, 현실의 편의성이 좋아지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베데스다에서 1등을 달성하고 오병이어의 놀라운 수익률을 달성하는 것은 신앙을 도구화하는 것이다.
이제 내가 속한 자리는 환경을 탓하는 자리가 아닌 일어나 걷는 자리가 되어야 한다. 나의 인생 열쇠를 여전히 무례한 타인이나 불공평한 세상에 맡겨둔 채 주저앉아 남 탓하던 내 모습을 떠올려본다. 5장을 여러 번 되뇌면서 모든 핑계를 뒤로하고 주님의 음성에 응답하는 것에 집중해본다. 오늘, 주체성을 회복하고 사랑을 향해 일어서는 하루가 되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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