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의 문맥

코스모스 안의 카이로스. 요한복음 7장 1-13절 본문

묵상_에세이 [성경의 서사]/요한복음

코스모스 안의 카이로스. 요한복음 7장 1-13절

집사 K 2026. 2. 22. 22:29

예수님은 위협을 피해 유대 지역을 떠나 갈릴리를 다니신다. 그의 형제들은 예수께 존재감을 세상에 드러내라고 말한다. 여기서 세상(코스모스)은 인류애가 아닌 세속적 질서, 즉 자기중심적 체계일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내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러나 너희 때는 언제나 마련되어 있다."

예수님의 여러 대화의 특징 중 하나는 상대와 대화가 겉도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이것은 서로 다른 차원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더 강하고 알아듣게 설명하지 않으시는 이유는 아마도 점진적인 말씀의 구조상, 즉각적인 설득이 본질적인 도움이 되지 않음을 아시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나중에는 그 뜻을 알 수 있게끔 말씀의 단서들을 남기신다.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조망하는 자만이 가능한 설계다. 
결국 지나봐야 아는 것이다.

"내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 예수님의 때가 고난의 순간임은 금세 이해가 된다. 
하지만 '너희 때는 언제나 마련되어 있다'는 구간에 한참 머물렀다. 일차적으로는 세속을 추구하는 상태를 뜻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질책 어린 말씀에서 '오래 기다리는' 분의 안타까움을 느낀다.

이 대목은 다른 시간에 대한 이야기다. 카이로스와 코스모스, 하나님과 인간의 가장 큰 차이 중 하나인 다른 시간축이다. 
질서와 연관하여 세상을 뜻하는 코스모스는 요한복음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속적 질서, 즉 무질서로 사용된다. 혼돈의 방향인 엔트로피의 흐름으로 이동하는 코스모스의 세속. 그리고 그 혼돈을 거슬러 참된 질서를 향하기로 결단한 '회개'의 시간. 그리고 개입하시는 카이로스. 이 과정이 이어지면 결국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태초의 지점을 향해 서로 가까워진다.

코스모스를 사는 인간에게 카이로스는 언제나 열려 있다. 시간축을 초월하여 기다리신다는 뜻이다. 반면 예수님의 시간은 인간의 차원 안에서 기다림이 필요하다. 같은 인간이라도 누구는 코스모스에 휩쓸려가고, 누구는 예수와 함께 카이로스의 영생에 동참한다. 예수님의 말씀이 비난으로만 읽히지 않는 이유이며, 그 안에는 온기 어린 초대가 담겨 있다.

초막절은 광야를 기념하는 날이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피해야 한다. 본질을 기억해야 할 절기가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당시 사람들의 동기는 메시아를 세상의 스타로 만들려는 욕망이었을 것이다. 구시대의 항아리가 아닌 신세계의 영생을 누려야 한다는 말씀이 주어진다. 세속의 시간에 젖어 살면 예수님을 미워하는 그룹에 속했다는 것조차 모른 채 살게 된다. 교인으로서 경각심을 갖게 되는 대목이다.

나에게도 때론 사소하게 거리를 두고, 때론 진지하게 포기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말씀을 통해 마음을 돌려본다.
영원한 리더도, 영원한 낙오자도 없는 바퀴와 같은 것이 공동체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넘어질 수 있고, 나 또한 종종 넘어져 지체된다. 그때마다 나를 포기하지 않고 기도해주는 누군가를 기억해 본다. 차원이 다른 답답한 소리를 하는 형제를 포기하지 않는 예수님의 기다림을 닮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