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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분쟁] 정의는 왜 분쟁을 유발하는가 본문

묵상_칼럼 [누가복음에서 사도행전, 인문학적 고찰]

8화 [분쟁] 정의는 왜 분쟁을 유발하는가

집사 K 2025. 7. 24. 20:17

평화가 선포된 날, 아이들이 죽었다.

누가복음 2장에서 천사들은 예수의 탄생을 알리며 선포한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그러나 곧이어 마태복음 2장에서 베들레헴의 아기들이 죽는다.
헤롯은 위협을 느끼고, 두 살 이하 아이들을 학살하라고 명한다.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는커녕, 무고한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뒤따랐다.

이 연결은 하나의 질문을 제기한다.
하나님의 평화가 선포된 그 순간, 왜 폭력이 따라왔는가?

많은 이들이 평화를 갈등이 없는 상태로 착각한다.
질서가 유지되고, 큰 목소리가 없고, 일이 조용히 돌아가는 상태.
하지만 그것은 진짜 평화가 아닐 수도 있다.

로마 제국은 ‘팍스 로마나(Pax Romana)’, 즉 로마의 평화를 자랑했다.
그러나 그 평화는 칼 위에 세워진 평화였다.
복종하는 자들에게는 질서가 주어졌지만, 저항하는 자에겐 침묵이 강요되었다.
이런 평화는 결국 힘의 통치에서 비롯된다.

역사적으로도 정의가 선포될 때마다 분쟁은 발생해왔다.
흑인 인권 운동, 반독재 민주화 운동, 노동자의 권리 투쟁 등은
오래된 질서를 뒤흔들며 사회적 충돌을 유발했지만,
결국은 더 나은 평화를 향한 발걸음이었다.

물론, 모든 분쟁이 정의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벌어진 수많은 전쟁들,
특히 중세 십자군 전쟁은 그 대표적인 왜곡된 사례다.

십자군은 “하나님의 영광”과 “성지 탈환”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그 실제 동기와 결과는 정치적 이익, 폭력의 확대, 신앙의 권위 오남용으로 이어졌다.
이처럼 복음의 이름이 세속적 권력과 결합할 때, 그 분쟁은 더 이상 진리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진리를 가장한 지배의 도구가 되어버린다.

진짜 정의는 자기 자신에게도 날카롭다.
그것은 누군가를 억누르기 위해 등장하지 않으며, 항상 고통받는 자들의 언어로 시작된다.

그렇다면 천사들이 말한 평화는 무엇인가?

그 평화는 칼을 든 평화가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 다시 말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안에 있는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존재의 평안이었다.
예수의 탄생은 세상의 위계와 질서를 다시 짜는 일이다.
기득권에게는 위협이 되었고, 주변부에게는 희망이 되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요한복음 14: 27)

복음의 평화는 팍스 로마나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예수는 강제하지 않았다.
그는 다가왔고, 사람들은 반응해야 했다.
이 평화는 무력으로 확장되지 않았고, 왕궁 대신 말구유에 자리했다.

그렇기에, 복음의 평화는 갈등을 제거하지 않는다.
오히려 갈등을 드러내고, 숨겨진 억압의 구조를 흔든다.
정의는 언제나 그렇게 분쟁을 유발한다.
왜냐하면 그 정의는 거짓된 평화를 위협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노라.” (마태복음 10:34)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그 정의가 전복적일수록, 불의한 권력자들은 그것을 제거하려 한다.
그 순간 평화는 깨어진다.
하지만 그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오히려 진짜 평화가 시작되는 징조다.

예수는 그렇게 왔다.
폭력과 통제의 질서 한가운데에서,
말할 수 없던 자들의 이름을 불러내며,
새로운 평화의 구조를 시작하셨다.

이 글의 원형: 누가복음 2장 묵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