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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편 본문

묵상_에세이 [성경의 서사]/시편

시편 1편

집사 K 2026. 7. 2. 00:14

지난 창세기와 요한복음 그리고 고린도전서를 묵상하면서,
한편으로는 우주적이고도 하나님의 신성과 깊이 연결된 쉽지 않은 이야기들을,
또 한편으로는 교회의 질서와 공동체의 의미라서,
나름대로 치열하게 붙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나에겐 묵상의 시간이 무엇보다 즐거움이었다.

그래서인지 이제 마주한 시편 1장의 말씀이 위로와 격려로 다가온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시편 1-2)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시편 1-3)

주야로 묵상하는 것, '하갈', 
곧 읊조리며 곱씹어 내면화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시냇가의 나무는 공급을 받기 위해 끊임없이 시내를 향해 뿌리를 내린다. 
어쩌면 그 공급을 갈구하며 살아가는 것 자체가 이미 복 있는 사람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주야로 묵상하는 것은 거대하고 보기 좋은 나무가 되기 위함이 아니다. 
그것은 생명을 향한 매일의 식사이며 일상이다.

말씀에서 말하는 형통함이란 반드시 인간적인 성숙이나 세속적인 성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 순간 살아 있음을 느끼는 것에 더 가까운 것 같다. 
때로는 메마르고, 때로는 흔들리더라도,
시냇가에 뿌리를 내리고 생명을 공급받으며 살아가는 것 자체가 이미 형통의 모습이라고 이해한다.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시편 1-4)

때로는 위선의 프레임을 마주하기도 한다. 
완전하지 못하면서 어찌 말씀을 말하느냐는 질문은, 진리를 묻기보다 사람을 침묵하게 만드는 방식이다.  
그러나 성경은 완벽한 사람들만이 말씀 앞에 설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악인은 기본적으로 허무에 익숙하고, 그래서 그들의 말은 바람에 나는 겨처럼 가볍다. 
그것은 그들 스스로 느끼는, 말씀이 생명의 진리일 수 있다는 믿음 정도의 무게일 것이다.

과거에는 스스로에게서 발견되는 위선과 부족함이 오히려 나를 말씀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말씀 속 의인뿐 아니라 악인으로 묘사되는 모든 인물들마저 거울처럼 나를 비추어 주고 있음을 느낀다. 
내가 이미 성숙하고 인간적으로 결함이 없기 때문에 말씀을 읽고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말씀을 통해 더욱 나 자신을 돌아보고, 부족함을 발견하며, 조금씩 겸손을 배워가는 과정 자체가 의미 있음을 믿게 되었다.

시냇가의 큰 나무가 되고 싶어서가 아니라, 생기 어린 시냇물을 공급받고 싶어 말씀을 마주한다. 
그리고 말씀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공동체를 더욱 귀하게 여기고, 이 가치를 함께 소중히 여기는 이들과 함께하고 싶다.

오늘의 시편 1편 말씀은 다시 한번 나에게 큰 위로가 된다. 
완전해서가 아니라 살고자 시냇가를 찾는 사람, 
넘어지더라도 다시 말씀으로 돌아오려 하는 사람을 향한 위로의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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