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의 문맥
시편 2편 본문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시편 2:1)
의인은 누군가를 살리기 위한 말씀을 중얼거리며 묵상한다.
악인은 누군가를 죽이기 위한 음모를 중얼거리며 묵상한다.
같은 단어인 '하가'.
인간은 무엇을 마음에 품고 말하는지에 따라, 의인과 악인의 사이를 오갈 수 있는 존재라는 생각을 한다.
누구도 이 점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기에, 늘 겸손해야 하는 이유가 된다.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 (시편 2:4)
악인의 음모는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이 가볍다. 하지만 현실에서 만나는 관계는 그렇게 가볍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악인이 부리는 권력은 우스울 정도로 작은 것이다.
인간적인 프레임에서는 누군가 원망스러울 때가 있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안타까운 존재처럼 느껴진다.
현실 도피처럼도 보이지만, 어쩌면 현실에 대한 더 정확한 해석인지도 모르겠다.
현실은 마주하면 나보다 커 보이지만, 말씀에 비추어 내려다보면 작아 보인다.
내 눈에 비친 어떤 상대를 볼 때, 그와 함께 있는 나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려 한다.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 (시편 2:12)
복 있는 사람은 소란스러운 일을 작은 소음 정도로 여길 수 있는 여유가 있을 것이다.
만약 억지로 참아야 한다면 복이 아니라 화가 된다.
결국 스스로 음모를 중얼거리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는 상태가 될 수 있다.
나는 최근 주변의 소란에 대해 순리에 맡기기로 했다.
소란을 작은 소음으로 여기니 메마르던 마음에 생기가 도는 것을 느낀다. 나는 말씀으로 도망친다.
하나님의 관점은 마치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볼 때 인간의 갈등이 보이지 않는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이 거대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거대한 관점이 말씀을 통해 이 마음을 비추어 주신다는 것에 은혜를 느낀다.
사람에게 인정받으려 했던 마음을 내려놓는다.
위협적인 상대에 대한 다윗의 시적인 저항 속에서, 강퍅했던 내 마음을 마주한다.
다윗의 시는 고통스러운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으로 인해 웃을 수 있는 간증이다.
그의 말에 집중해서 듣고 있는 태도를 유지하게 된다. 닮고 싶어서 자세를 바로 잡고 듣는다.
수년 전 욥의 신념을 보며 말씀을 붙잡게 하는 동력을 얻었고,
무지개에 비친 섭리와 바울의 수사는 말씀 묵상에서 건진 선물이었다.
이제 다윗에게서 관점을 보고 있다.
나는 성경 말씀의 구조 안에서 진리의 조각을 발견하는 듯한 그 감각이 즐겁기도 하지만,
종종 현실의 갈등을 마주할 때 성경을 인간 존재와 관계 설명서처럼 보기도 했다.
그럴 때면 독해 자체에 과몰입하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를 타자로 보게 한다는 점이 유익이 된다.
그런 말씀의 거울 앞에서, 누군가를 판단하고 정죄했던 순간들을 함께 돌아보게 된다.
시편은 종종 매일성경 네러티브 사이의 쉬어가는 페이지처럼 배정되곤 해서,
한 호흡으로 지나온 고린도전서 이후 잠시 숨 돌리듯 가볍게 지나가려는 마음도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 큰 위로가 되어 오래 머물게 된다.
아니, 그렇기에 더 쉬어가는 시간을 얻는다.
샘을 향해 애써 뿌리 뻗는 나무에게 부족함 없이 비가 내리는 이 시간이 감사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