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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득될 마음. 고린도전서 8-10장 본문

묵상_에세이 [성경의 서사]/고린도전서

설득될 마음. 고린도전서 8-10장

집사 K 2026. 6. 20. 22:34

[모순]
바울은 교회에서 스스로 엘리트라 여기는 교인들과 편지로 대면한다. 
시대적 배경과 제한으로 편지의 일방적인 형태이지만, 그 안에는 논쟁처럼 느껴지는 치열함이 있다.
그래서 입장의 차이를 더 구체적으로, 마치 서로 직접 대면한 것처럼 묘사해보았다.

여기에는 공동체를 향한 개인적인 시선을 담은 부분이 있다.

그들은 성경을 근거로 다른 교인을 넘어뜨린다. 신앙의 비본질적인 영역을 내세워 신앙의 본질을 훼손하는 모순을 보인다.
즉, 신앙을 말하면서도 정작 신앙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상대의 논리는 이렇다.
"믿는 자들에게 우상은 무가치하다. 그러니 제사 음식에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으며 먹는 것 또한 아무 문제가 없다."

그들은 제사 음식을 먹는 것을 거리낌 없는 권리처럼 말한다.
그러나 우상 숭배가 만연했던 문화 속에서 살다가 교회를 나오기 시작한 새신자나, 그 문화 자체에 대한 거부감이나 아픈 기억이 있는 교인에게 그 모습은 굉장히 혼란스럽고 신앙적으로 넘어지게 할 수 있는 행동이다.
자주 쓰이는 표현으로 "그 행동이 주변에 덕이 되지 않는" 것이다.
요즘 말로 더 쉽게 표현하면, 공감 능력의 결여이다.

[배려]
문화는 시대에 따라 변한다. 하지만 성경이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본질적 기준은 '사랑'과 '약자를 향한 배려'이다.
교회 안에 형성된 오랜 관습이나 권고들이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답답한 틀처럼 보일 때도 있다. 그러나 성경에 문자적으로 명시되지 않았더라도, 공동체가 오랜 시간 지켜온 문화의 기저에는 서로가 실수하지 않고 연약한 누군가를 넘어뜨리지 않기 위한 나름의 배려와 질서가 담겨 있는 경우가 많다. 타인의 마음을 지켜주기 위해 나의 자유를 기꺼이 제한하는 태도는, 공동체의 신앙을 붙들어 주는 든든한 버팀목이 된다. 

바울이 경계하는 것은 자신의 지식을 근거로 타인을 넘어뜨리는 태도에 있었다. 그리고 그런 태도의 시작은 고린도 교인들이 스스로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착각한 데 있었다.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고린도전서 8:2)

성경 지식이 결과적으로 상대의 약함을 무시하는 도구로 사용될 때, 그것은 선한 목적을 위해 사용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모르고 행하면 교만이고, 알고 행하면 기만이다.
성경에 위배되지 않아서 해도 되는 권리처럼 보이지만, 그리스도인에게는 하지 않아야 하는 의무에 가깝다.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리라" (고린도전서 8:13)

이 말을 한 바울은 넘어지는 사람을 붙들고 자신의 정당성을 설득하려 들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권리를 기꺼이 포기하겠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사랑 때문이다. 권리를 포기함으로써 한 영혼을 넘어뜨리지 않고 지키는 것이다.
바울은 나아가 누릴 수 있는 생존권조차 스스로 내려놓는 모습을 보인다.

성경에 대해 지식이 쌓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성경의 맥락에서는 풍성한 하나님의 성품과 방향성이 반복된다. 그래서 성경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는 것은 점진적으로 더욱 따뜻해지는 것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바울은 바로 이 지점에서 고린도 교인들의 논리를 반박한다.
바울의 논증에서 가장 인상적인 점은, '무엇을 먹어도 되는가'에 대한 그들의 프레임을 '그 무엇이 공동체를 살리는가'의 문제로 전환시킨다는 것이다.

[프레임]
특정 음식을 먹느냐 마느냐와 같이 구원에 영향을 주지 않는 비본질적인 문제 자체에 매몰되는 것은 상대의 프레임에 갇히는 꼴이며, 그 프레임 안에서 대화를 이어가면, 결국 특정 음식을 먹으면 안 되는 이유를 찾지 못할 경우 상대가 이기는 구조를 벗어날 수 없다. 애당초 '살리기 위함'이 아니라, '이기기 위한' 판이기 때문이다.

고린도 교회의 맥락에서는 그들의 행동이 공동체를 살리기 위함이 아니라, 연약해 보이는 이들을 이겨서 계급적 구분과 지배 구조를 만들려는 것으로 해석된다. 즉 공동체의 계급화이다. 바울이 말한 질서의 두 가지 측면(계급의 질서, 생명의 질서)을 담은 '케팔레'라는 원어가 이를 뒷받침한다.

교회에서는 어떤 사안이든 신앙의 핵심 가치인 '하나님의 영광'과 보편적 윤리인 '공동체의 유익'으로 연결하는 신앙의 프레임으로 전환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제사 음식? 당연히 먹어도 문제는 없다. 다만 다른 이들을 배려하여 눈에 띄지 않게 먹으면(공공연하게 먹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논쟁]
교회 안에서의 논쟁은 일반적으로 갈등을 유발하기에 특별한 사안이 있을 때가 아니면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바꾸어 말하면 필요할 때는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상대를 이기기 위한 목적은 아니다.

바울도 치열하게 논쟁했고, 종교개혁 또한 피를 두려워하지 않는 논쟁의 과정 속에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이 이기기 위해 논쟁하지 않았다. 오직 '말씀이 살아나는 논쟁'을 했다.

상대를 무너뜨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리를 남기기 위해 논쟁했고, 자신의 감정적 상처를 풀기 위해 상대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 또한 결국 생명의 길을 걷게 하기 위해 권면했다. (예수께서 상대를 저주하며 논쟁을 하시기도 했지만, 이는 심판자로서의 역할적 맥락이 다르기 때문에 조금 다른 경우이다. 그럼에도 논쟁이 신앙을 왜곡하는 이들에게는 생각을 돌이킬 수 있는 기회인 것은 마찬가지이다.)

어긋나면 바울처럼 서로 단호하게 붙잡아 주고, 넘어지면 함께 일으켜 주는 곳 또한 교회이다.

[사람을 이기는 마음, 말씀에 설득될 마음]
말씀은 삼각 거울처럼 내 여러 면을 보게 한다. 나 또한 이 여러 입장 모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바울의 가르침에 기꺼이 '설득될 마음'을 품고, 사랑과 기다림으로 교제하는 교회를 바라본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린도전서 1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