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의 문맥

은사가 머무는 곳. 15장 본문

묵상_에세이 [성경의 서사]/고린도전서

은사가 머무는 곳. 15장

집사 K 2026. 6. 21. 00:10

15장은 갑작스럽지만 부활과 관련된 많은 궁금증을 풀어주는 듯 그 다루는 주제가 깊다.

허나 부활에 대해 말하는 바울의 말에는 확신은 있지만 그 자체로 명쾌하지는 않다. 변증적으로 그렇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이것은 그저 하나의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믿음의 고백으로 들리기도 한다. 처음 이 글을 읽고 바울의 논리에 맹점이 눈에 먼저 띄기도 했다. 전후 맥락을 따지지 않으면 바울답지 않다는 느낌을 준다.

하지만 바울은 교회 밖에서 만난 사람들에게는 빈틈없는 논리를 펼쳤었다.
그리고 이 글은 편지의 구조라서 일방향적인 서술이다. 
그렇다면 상대의 주장에 담긴 논리가 전제되어야 바울의 이야기가 완성된다. 

이 편지의 수신자는 고린도 교인이다. 
고린도 교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 
하지만 그들의 신앙 관점에는 문제가 있다. 
고린도 교인의 문제점을 대입하여 바울의 말을 풀어본다.

1. 육체의 부활에 대해 이야기한다. 
일부 고린도 교인들은 영혼만 고귀하고 육체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현실을 사는 육신의 행동이 난잡해지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 하지만 바울은 육신이 부활 이후에도 유효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죽고 난 이후 부활에 육신이 유지되는구나'라는 궁금증의 해소에 그치지 않고, '죽기 전 현실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이야기하는 것'에 방점이 찍혀 있다. 이렇게 바울의 논리를 역산해보면 '현생이 지니는 중요성'으로부터 의미를 찾기에, 영원의 측면에서도 육신은 그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결론이 꽤 논리적이다. 그래서 겉보기엔 그저 맹목적인 믿음을 강요하는 선언 같지만, 육체를 쓸모없게 여기며 방종하던 고린도 교인들의 삶을 전제로 보면 이 말씀은 정교한 변증이다.

2. 부활이 사실이 아니면 이런 노력이 헛되지 않느냐? 
이 자체만 놓고 보면 순환 오류, 즉 억지 주장에 가깝다. 여기에도 고린도 교인의 주장인 '육체의 부활이 없다'는 것이 상대 주장으로 전제가 되어야 한다. 즉, 정말 육체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의 부활 또한 사실이 아닌 것인데, 그렇다면 너희 고린도 교인이 자랑하는 그 논리가 다 헛된 것, 즉 너희의 열심이 헛된 것이 된다. 물론 이것은 승천 이후 육체의 현재 상태를 증명하려는 목적이 아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이미 사실로 동의하고 있는 부활 사건의 범주 안에서 그들의 모순을 짚어낸다. 이것은 그들의 우월감을 그들의 논리로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상대는 외면하기 힘든 설득력을 느끼게 될 것이다. 반대로 일반적인 상황에서 무신론자에게 이 논리를 그대로 사용하면 억지로 보일 수 있다.

3. 죽음의 절대적 위상을 통해 계급 구분, 권력 놀이가 얼마나 하찮은지 보여준다. 
결국 부활 외 어떤 은사도 결정적 역할을 하지는 못한다. 방언을 유창하게 한다고 죽음을 이기는 것은 아니며, 성경을 통달하거나 전도를 많이 했다고 해서 죽음을 이기는 것도 아니다. 어떤 은사도 부활의 능력 아래 동등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4. 부활 신앙에서도 정말 소중한 것은 육신으로 살아가는 평범한 일상이다. 
일상에서의 수고, 서로를 섬기는 마음과 행동을 향한 걸음은 헛되지 않다는 따뜻한 격려로, 스스로 드러내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알아주신다는 확신을 준다.

5. 정리하면, 종말론이 현생의 윤리에 어떤 지침을 주는가이다. 종말이 예고되었다고 해서 그리고 종말 이후 육체가 아마 사라질 것이라는 이유로, 한번의 고백을 믿고 방종하게 살지 말라는 것이다. 육신의 행동이 정신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을 리 없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고린도전서15장 58절)

[편지라는 매체와 말씀 전달의 연관성]

바울은 상대에게 맞춤형으로 적절한 이야기를 하는 대화의 은사가 있다. 그의 대화법은 편지의 형식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편지를 읽는 수신자는 비록 지적을 받더라도 명쾌하면서도 따뜻한 지침으로 받게 될 것으로 보인다.

편지라는 매체는 받는 이의 의지와 상관없이 전달되지만, 그렇다고 강제적이지 않다. 읽는 입장에서 봉투를 열어서 애써 읽지 않으면 전달되지도 않는다. 메시지의 수용 여부에 대한 결정권은 수신자에게 있다.
이 점에서 인간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 또한, 이런 구조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좋은 내용이어도 봉투를 뜯는 수고를 하지 않거나, 확인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수신자를 향한, 그 누구보다 사랑하는 마음을 담은 내용이라면, 그 또한 생각지도 못한 선물이다.
바울의 이 편지는 읽는 이에게 선물과 같은 은혜가 되고, 이 또한 은사라고 할 수 있다.

수신자인 고린도 교인 각자의 재능이나 특출남이 아니라, 그들을 누구보다 사랑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바라는 이 말씀이 그들의 가장 큰 은사이다. 말씀에서 비롯된 교회 안에서의 활동이라면, 겸손과 교만을 따질 것도 없는 선물과 같은 은사가 된다.

온기는 특출나다고 표현하지 않는다. 은사도 마찬가지로 특출나지 않다. 
특출난 것은 인간이 극복할 수 없는 그 죽음의 위엄조차 관통하는 부활의 신앙뿐이다. 하지만 특출나지 않다고 해서 온기가 하찮다고 할 사람은 없다. 

은사는 분류할 수 있는 게 아닐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서로 조금씩 온도가 다르다. 하지만 함께 있을 때 온기는 더 따뜻하게 다가온다. 은사는 얼핏 다른 개성으로 보이지만, 결국 누구에게나 있다. 그리고 온기는 화려한 무대가 아니라 일상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은사 또한 그래야 한다.

은사는, 받고자 다가오는 사람에게 전달될 수 있는 공동체라는 공간에 머문다.